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 : 인간, 근대화, 유신, 그리고 몰락 (2010·02·24)
세상보기 2011. 6. 2. 14:09
길지만 좋은 글입니다. 한번씩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 퍼옵니다.
임혁백(任爀伯)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제 한국학 연구소 연례 학술회의, 2009년 12월 18일 명지대학교 서울 캠퍼스 행정동 3층 대회의실
1. 서론
“5.16 군사 쿠데타”는 박정희의 “근대국가 만들기”의 시작을 알렸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근대국가 만들기”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근대화의 3대 프로젝트가 국민국가건설 (nation-building), 산업화 (industrialization), 민주화라고 할 때, 박정희는 “압축적 산업화”의 기적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민주화의 지연이라는 희생과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가능하였고, 분단국가의 해결에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당함으로써 제2의 민족건설 (second nation building)의 과제를 후세대에게 넘겨주었다.
박정희의 근대국가 만들기는 미완으로 끝났으나 그의 개발독재 또는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로 불리는 그의 경제발전 모델과 업적은 국내외에서 모방과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1987년 민주화 이후 박정희는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들 (‘3김’으로 통칭)을 제치고 가장 인기있는 정치지도자, 국가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는 현재 현역 정치인 중에 가장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선두주자이다. 박정희 시대에 성공신화를 만들었던 건설회사 사장이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박정희의 독재에 저항했고 엄청난 박해들 받았던 ‘민주투사’출신들도 박정희의 발전국가 모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박정희는 죽었으나 그는 죽지 않았고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깊이 각인되어 있다.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의 수행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과거에 좋았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국민들 속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한국의 보수세력은 박정희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와야한다면서 재기를 시도하였다. 신생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 (disenchantment)이 ‘좋았던 권위주의의 과거’ 즉 박정희 시대를 다시 호명하게 한 것이다.
박정희 발전모델에 대한 관심은 밖에서 더 지대하였다.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로 ‘박정희 모델’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모델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의 "Look East" 정책의 “East” (한국)였다. 러시아의 옐친도 박정희 모델을 모방하여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을 만들려하였고, 중국의 등샤오핑도 박정희 모델로 중국을 근대화하려하였다(임혁백, 2004:227). 이와 같이 박정희 모델에 대한 관심은 국내보다 외부에서 더 높았고, 박정희 사후에도 “우리에겐 박정희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들이 후후발국가들의 정치인과 학자들 사이에 나오곤 했다.
민주화 이전에 박정희의 발전모델에 대한 언급은 주로 민주화 운동권과 진보적 사회과학자,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주로 박정희 모델이 성장을 위해 분배를 희생하고, 권력을 집중시켜 대다수의 국민의 자유를 희생시켰고, 중화학공업제품을 근간으로 하는 외부지향적 성장도 1978년 제2차 오일쇼크로 해외수요의 격감으로 위기를 맞았다고 비판하였다.
민주화 이후 박정희의 발전모델에 대해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1997년 말의 외환금융위기와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이다. 국가부도사태 직전으로까지 몰고 간 총체적 경제와 사회위기는 소위 ‘박정희 모델’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였고,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내건 국정이념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론”은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박정희의 유신권위주의는 “불가피하였다”는 개발독재와 경제성장 간의 선택적 친화론은 “1960년대, 1970년대라는 당시의 ”민족시간“ (national time)에서 불가피하였다”로 평가절하되기 시작하였고, 외환금융위기 이후에는 유신권위주의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지연시킨 장애물이었다는 “유신불필요론,” “역사의 죄인 유신론”으로 추락하였다.(한국정치연구회, 1998; 조희연, 1997; 임혁백, 2004: 227). 2007년 말 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 이후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다시금 강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보수세력 내에서 박정희를 복권시키려는 강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 50주년을 맞아 본 논문은 박정희의 경제발전 모델 (개발독재론)과 업적에 관해 역사적 평가를 하고 박정희에 의해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적 경제발전과 1987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민주정부의 경제발전 모델 (민주적 발전론)과 업적을 비교함으로써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발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먼저, 정치체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5가지 시각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 후발산업화국가에서 경제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박정희와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고 있다. 말하자면, 후발 산업화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가 (“발전국가와 민주주의간의 양립가능성”), 양립할 수 없다면 (“발전국가와 권위주의의 선택적 친화성”), 반드시 박정희와 같은 권위주의 지도자가 필요했는가를 살펴보고 난 뒤, 박정희의 발전국가 (개발독재국가)가 그 당시 (60년대 70년대)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역사적으로” 필요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1989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민주정부의 경제발전 실적을 살펴보고 이를 권위주의 시대와 비교함으로써 민주화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민주정부 무능론,” “개발독재 우위론,” “유신군주 박정희 복원론” 등이 가지고 있는 허구성을 실증적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2. 정치체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와 경제발전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5가지 시각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에 관해서는 5가지의 시각이 존재한다. (Chen, 2007; Przeworski, 2004) 1) ‘선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의 ‘근대화 이론’; 2) 경제발전과 제도화의 미비가 결합해서 나타나는 ‘(신)집정관주의론’(praetorianism); 3)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관료적 권위주의론’; 4) ‘선 민주주의, 후 경제발전’론; 5)정치체제와 경제발전에 확실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불가지론’이다.
1)근대화론
근대화론은 시장경제가 창출하는 경제적 풍요가 시장과 민주주의 간의 친화력의 원천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는 바로 경제발전을 촉진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번성케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풍요의 경제가 산출하는 정치문화 토양 위에서 가장 잘 자라는 정치체제이다. 경제적 풍요가 관용, 화해, 타협을 선호하는 민주적 정치문화의 형성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근대화 이론의 시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이고, 베링턴 무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테제로 발전시켰고, 세이모어 마틴 립셋 (Seymore Martin Lipset)이 이론적으로 정교화시켰다. (Aristoteles, 1959; Moore Jr., 1966, Lipset, 1959)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민주주의 (politeia)는 두터운 중산층 위에 번성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포용, 관용, 타협의 민주적 정치문화가 경제적 풍요위에 가장 실현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가난한 다수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중우정치)로부터 덕성이 있는 민주주의인 폴리테이아(politeia)로 가기 위해서는 중산층이 다수를 점하는 경제로 바뀌어야 한다. (Aristoteles, 1959)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테이아는 소수의 부자가 지배하는 과두제와 가난한 다수가 지배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정치체제로서 가난한 다수는 수에 근거한 주장을 완화하고 부유한 소수는 재산에 근거한 주장을 완화하여 서로가 상대방이 주장하는 근거에 의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다수의 빈자가 소수의 부자가 주장하는 근거 위에서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빈자들이 충분한 부를 소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빈자의 중산층화가 덕성이 있는 민주주의, 즉 폴리테이아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배링턴 무어는 자본주의의 주체인 부르주아지가 반동적인 농촌지주계급을 제거하고 지배계급이 되었을 때,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자신의 이미지, 이념, 사상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변모시킴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립셋 (Lipset)은 민주주의는 충분히 경제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데 단지 경제가 어느 수준 (민주화에 필요한 경제구조적 전제조건)에 도달한 뒤에야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잘 양립할 수 있고 상호강화하는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Lipset, 1959) 통시적으로 볼 때, 이 시각은 ‘선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 시각이라 할 수 있겠다.
근대화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상대적으로 앞서가고 있었던 제3세계 국가에서 민주주의 정부가 전복됨으로써 거의 폐기된 것처럼 보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시장지향적 산업화를 추구해 온 권위주의 국가인 스페인, 한국, 대만, 칠레 등에서 민주화가 일어남으로서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한 통계학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장지향적 경제발전이 민주화로 인도하기보다는 권위주의체제를 안정적으로 지속시켜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Diamond, 1997: 48)
근대화 이론가들은 시장경제가 창출하는 경제발전이 마침내 전 지구촌을 민주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발전은 두터운 독립적인 중산층을 낳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을 출현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마샬(T. H. Marshall)이 이야기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시민권의 확대를 요구하게 한다. 경제가 발전하게 되면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고 조직되며, 새로운 노동과정은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 근대화되면 자율적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그 결과 사회는 더 이상 명령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없게 되며, 국가와 시민사회의 경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Diamond, 1994a:8)
“신근대화이론”(neo-modernization theory)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인과관계 보다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내구성 (durability),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Przeworski et al., 2000) 신근대화 이론은 경제발전과 민주화 간에 인과관계는 뚜렷치 않으나 부유한 민주국가 (1975년 아르헨티나 per capita income $6,055 기준)하에서 민주주의가 전복되거나 붕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rzeworski, 2004) 쉐보르스키는 최근의 논문과 저서에서 권위주의 하에서의 경제발전이 궁극적으로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근대화이론은 사실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통계적 자료로 증명된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경제 하에서 이미 확립된 민주주의는 외부적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복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내구성과 지속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Przeworski, Alvarez, Cheibub, Limongi, 1996:41).
2) 경제발전, 낮은 제도화, 집정관주의
둘째, 제도화를 강조하는 헌팅턴 (Huntington)의 입장으로 정치체제가 제도화되기 이전에 경제발전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해지 못할 때, 정치체제는 오히려 퇴화 (decay)하여 군부나 포퓰리스트 독재자가 이끄는 집정관주의 (pratorianism)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퇴화 이후 정치불안이 계속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화의 노력이 나타나고 제도화의 결과 민주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Huntington, 1968) 러시아의 경우, 정치적 자유화가 제도적 혼란으로 종결됨으로써 필요한 경제 개혁을 지연시켰다. (Sheifer, 1998)
3) 관료적 권의주의론: "후발산업국가에서 경제발전은 권위주의를 가져온다."
셋째, 근대화 이론과 대치점에 있는 이론으로서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특히 중국의 예를 들면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를 초래하지 않는 이유는 권위주의 정부가 국민들에게 경제발전의 과실을 향유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고 따라서 정치적 자유화의 길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Mesquita and Downs, 2005) 이 이론은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의 필연적 결과라는 근대화론의 시각을 전면 부정하고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의 입장을 펴고 있다.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 이 밖에도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시각에는 남미 브라질의 카르도소의 “종속적 발전이론,” (dependent development), 아르헨티나 정치학자인 오도넬의 “관료적 권위주의” (bureaucratic authoritarianism) 이론 등이 있다.
4) ‘선 민주주의, 후 경제발전’: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가져온다."
넷째,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선 민주주의, 후 경제발전“ 시각이다. (Kohli, 1986; M. Olson, 1993) 이 시각은 비교체제론적 기준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경제성장, 사회적 삶의 수준 등 모든 지표에서 지속적으로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능가하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 경제발전을 확대하기 전에 민주주의를 촉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Siegel, Weinstein, and Halperin, 2005) 이 이론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잔인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긴장하지 않으면서 양립, 공존, 병행추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Maravall, 1995: 25) 민주주의야 말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보장하고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도모하며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를 통한 합의의 도출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A.Kohli 1986; M.Olson 1991, 1993; 김일영, 1994: 10에서 재인용)
민주주의와 경제발전간의 갈등론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간의 양립가능론‘ (compatibility perspective)은 민주 정부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정통성이 있기 때문에 산업화 초기 단계 또는 개혁의 초기 단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단기적 비용을 분담하게 하는데 권위주의정부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도주의 학파와 재산권국가이론 (property rights theory of the state)는 성공적인 경제자유화에 필요한 제도, 독립된 법체계, 전문적인 관료제도, 안정적인 재산권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스 (North)에 의하면 시민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정부의 약탈적(predatory) 행태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필수적이다. (North, 1991) 로드릭은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보다 갈등의 관리에 있어서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Rodrick, 1999) 자유선거, 반대당의 보장, 언론의 자유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자유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관리에 필수적이다. 반면에, 권위주의 체제가 단기적으로는 강압에 의해 갈등을 회피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선 민주주의, 후 경제발전론”의 이론적 근거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이 주장하는 권위주의 개발 독재자는 장기적 시계를 가지고 자본주의 경제발전이라는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철인 왕 또는 신 군주라는 가설이 허구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민주 발전론에 의하면, 많은 경우 독재자들은 보편적 이익의 수호자(guardian)라기보다는 사익을 챙기는 약탈자(predator)이다. 따라서 사회의 이익집단으로부터 유리된 자율적인 독재자가 더 넒은 시간적 지평 하에서 장기적 관점에서 자원배분을 결정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선거라는 수직적 책임성 (vertical accountability) 장치, 정부기구간의 상호 견제와 균형이라는 수평적 책임성 장치에 의해 정부를 인민의 집단적, 공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권위주의 독재보다 더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한다는 것이다.(Przeworski and Wallerstein, 1988; 임혁백, 2000; Aslund et al., 1996)
마라발 (Maravall)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경제적 장점은 세 가지 측면에서 감지된다. (Maravall, 1995:15) 첫째, 민주적 정치시장에서의 경쟁은 정치인들에게 대중적 지지의 증가와 감소라는 상과 벌을 부과함으로써 정치인들로 하여금 기회주의적이고 자기이익 추구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공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둘째,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정치적 다원주의는 경제정책 결정에서 더 많은 양질의 정부를 제공함으로써 경제개혁에 수반되는 ‘거래비용’을 줄여준다. 자유언론과 야당이 대안을 제공하여 정책적 실패를 알려주고 시정할 수 있는 ‘조기경보시스템’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위주의는 단순한 투자의 축적이 요구되는 발전단계에서는 적합한 정치체제일지는 모르나 투자의 생산성이 요구되는 발전단계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셋째, ‘실적에 의한 정통성’(legitimacy by performance)에 의존하는 권위주의보다 절차적 정통성에 의존하는 민주주의가 경제위기에 더 강한 내구성을 보인다. 실적에 의존하는 권위주의는 경제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나, 표(지지)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민주주의는 위기시에 시민들의 협력을 더 쉽게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당과 노조로 하여금 단기적, 근시안적 요구를 완화하고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불가지론’: "특정 정체체제와 경제발전은 강한 상관관계가 없다."
마지막으로, 쉐보르스키 (A. Przeworski)로 대표되는 불가지론적(agnoticism) 견해가 있다. 쉐보르스키와 리몽기는 실증적 연구를 통해 정치제도 (political institutions)가 경제 발전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특정 정치체제 (political regimes)는 경제적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지는 않으며 국민들도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촉진하는지 아니면 저해하는지에 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정치체제 유형과 경제성장간의 관계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는 (inconclusive) 문제라고 주장한다. (Przeworski and Limongi, 1993; Przeworski, Alvarez, Cheibub, and Limongi, 2000)
이러한 불가지론은 ‘회의주의 시각’ (skeptical view)으로 이어진다. (Sirowy and Inkeles, 1990) 클라그에 의하면, 정치체제와 경제발전의 관계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내부에서도 커다란 편차가 존재한다. (Clague et al., 1996) 독재 하에서는 갭별 독재자의 시계 (time horizon)가 재산권과 계약권의 보장을 결정하나, 민주주의 하에서 그러한 권리의 보장을 결정하는 것은 체제의 내구성 (dyrability)이다. 알레시나와 페로티에 의하면,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특정 정치체제가 아니라 정치적 불안정과 불확실성이다. (Alesina and Perotti, 1994) 또한 독재자가 이익집단의 지대추구행위나 갈등관리에 있어서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권위주의 발전론도 전혀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3. 박정희의 경제발전 모델: 개발독재와 경제발전 간의 선택적 친화성 (elective affinity)
위의 5가지 이론적 모델 중 박정희는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선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의 논리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선발전, 후민주’론은 경제발전이 선행되어야하는 이유로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을 들고 나옴으로써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근대화론과 신근대화론의 가설보다는 “관료적 권위주의론”이나 “종속적 발전론”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의 이론적 논거는 민주주의 하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자본가, 소비하는 대중, 재산권과 계약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정치가와 정부 모두 단기적인 시계(short-time horizon)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지 않고, 노동자들은 단기적인 이익에 따라 즉각적으로 소비하려 하며, 표를 극대화하려는 정치인은 국가의 장기적 미래를 위한 성장정책을 취하기보다는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단기적인 분배정책을 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발전론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가난한 다수의 민중에게 표의 힘으로 그 동안 억눌려왔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 줄 기회를 제공한다. 민주화의 결과로 가난한 다수의 표가 정치권력의 향배를 결정하게 되면 정부는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비주의적 그리고 분배주의적 정책을 펴게 되고 투자에 들어갈 자원을 분배와 소비로 돌린다는 것이다. 가난한 다수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질 경우 민주정부는 즉각적 소비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재분배 요구에 대응하여 세금의 증대를 통한 소득이전을 꾀하게 한다. 또한 민주화로 인하여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에서 조직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면 그들은 독점적 노동공급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임금인상을 통한 즉각적 소비요구를 만족시키려 할 것이고 자본가들은 이로 인한 이윤감소에 대응하여 투자를 축소함으로써 경제의 성장은 정체할 것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경제정책은 사회집단의 단기적 이익추구에 반응하게 됨으로써 분배정치의 게임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결과는 소비의 증가, 저축과 투자의 감소, 예산의 팽창, 재정적자의 확대일 뿐이라는 것이다.(Galenson, 1959, de Schweinitz, 1959)
권위주의적 발전론은 민주주의와 급속한 경제성장은 양립가능하지 않으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선택의 문제’라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간의 갈등론" (conflict perspective)을 주장한다. (Lundstrom: 2002) 정치적 권리, 시민적 자유는 정부로 하여금 필요한 정책결정을 어렵게 할 수 있고, (World Bank, 1991) 대량해고와 사회적 권리의 축소가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초기 단계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권위주의 정부가 필요할 수 있고, (Fidrmuc, 2000; Edwards, 1991) 민주적 과정에 내재한 결과의 불확실성은 합리적 유권자로 하여금 경제적 자유가 장기적으로 복지의 증대를 가져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유의 축소를 선택할 수 있고,(Fernandez and Rodrick, 1991) 강력한 이익집단의 정치는 선출된 민주정부로 하여금 표의 극대화라는 단기적 시계에서 이익집단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책을 결정하게 되고 그 결과는 경제적 비효율성, 재분배정치, 과잉지출, 과소저축, 과소투자, 생산성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Alesina and Perotti, 1994; Alesina and Drazen, 1991)
권위주의적 발전론은 이러한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권위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에 더 적합한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첫째,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강제저축을 강행하고 소비를 축소해야하는데 권위주의 하에서 독재자는 노동대중의 즉각적 소비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둘째, 경제발전을 위해서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를 통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강력한 국가의 리더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권위주의 독재자는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권위주의 독재자는 대중의 표에 자신의 권력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선거주기에 따라 경제정책을 조작할 필요가 없으며(Maravall, 1995:14), 대중의 인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독재자는 분배정치의 압력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보편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Haggard, 1990: 262) 독재자는 노조가 집단행동을 통하여 임금을 인상시키고, 수출과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고 인플레를 유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특수 이익집단이 지대를 추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질서유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W. Galenson 1959; de Schweinitz, 1959, R. J. Barro, 1993, 임혁백, 2000)
4.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발전론에 대한 논쟁: “박정희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필요했느냐?” (“Was Park Chung Hee Really Necessary?”)
1960년대 1970년대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논리로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정당화한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허약한 장면 민주정부로서는 5000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산업화를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농촌지주계급을 중심로한 기득권과 서민과 노동자의 분배연합의 저항을 제어하고, 표에 의존하는 정치인들의 단기적 시각을 극복하고, ‘조국근대화’라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공익을 합리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와 같은 ‘근대 군주’(modern prince)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논리를 공유하고 있으나 “박정희가 반드시 역사적으로 필요했느냐?” (Was Park Chung Hee Really Necessary?)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박정희 옹호론자 내부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Im, 1990)
(1) 박정희 권위주의의 역사적 필연론
먼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역사적, 구조적 상황 하에서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서 박정희 (박정희와 개발독재)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박정희 권위주의의 역사적 필연론”이 있다.(조갑제, 1993; 김정수, 1994; 이석제, 1994; 김성진, 1994) 이들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었던 1960년대의 한국에서 국민을 기아로부터 구출하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책결정에 시간이 걸리고, 부패한 정치인들이 관료들의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방해하고, 선거구민으로부터 오는 각종 포크 배럴(pork barrel, 지역구 선심사업)로 점철되어 있는 민주주의로서는 불가능하고 박정희 장군과 같이 근대화를 일사분란하게 지휘 통솔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수립하고 수행할 수 있는 기술관료적 (technocratic)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박정희가 공식적으로 언명한 것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 발전론'으로 나아갔다. 박정희도 공식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에 대해 근대화론의 기본 입장인 ‘선 경제발전, 후 민주주의’를 “선 건설, 후 민주‘라는 구호의 형태로 수용하고 있다.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에서는 우선 경제건설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본 요건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박정희 “72년 연두 기자회견” (1977년 1월 11일), [박정희 전집, 9집], p.25.)
박정희의 이와 같은 언명은 전형적인 근대화론적인 언술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자들은 박정희 보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항상 낭비이며, 방종이고, 사회경제적 정체를 가져오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토대를 쌓을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이면서 계몽적인 '철인 왕'의 지도하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해야하고, 질서있는 사회,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다. (Zakaria, 1994, 김일영, 1994에서 재인용)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방종은 제재되어야하고, 진정한 자유를 위협하는 북한은 제거되어야 하며, 경제발전을 위해서 자유는 유보되어야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은 민주화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유를 유보하고 권력을 통합, 집중하여 분배연합을 억제하고 막스 베버가 이야기하는 관료적 합리성에 의해 경제발전을 꾀하는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이 주장하는 개발독재의 정당성의 논리를 넘어서서 “박정희 식의 개발독재는 현재까지도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으며, 그 유효성과 필요성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일영, 1994에서 재인용)
(2)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의 선택적 친화론 (elective affinity)
이와 같은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기본 가정을 받아들이면서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경제발전론을 한시적인 과도기적인 발전체제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있다. (김일영, 1994, 류상영, ) 이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양립은 이론적으로는 주장 가능하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이를 병행 추진한 예를 찾기 힘들다고 보며(Marx, 1964 (1895) Class Struggle in France) 이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ies)’을 인정하는 주장이 있다.(김일영 1994, 2005; 류상영 2006) 이러한 입장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치가 병행 추진하기 어려운 선택지임을 전제하고 있다.
김일영(1994)은 박정희 모델의 성격을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developmentalist authoritarian regime)라고 규정하며 발전국가와 권위주의의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다는 견지에서 1960년대의 경제발전 초기단계에 있어서 권위주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적어도 1960년대, 1970년대까지는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의 권위주의가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김일영에 있어서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의 친화성은 선택적이다.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의 논리를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들어선 오늘날의 한국에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정략적이라는 것이다. (김일영, 2005) 말하자면, 산업화 초기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박정희가 필요했으나, 산업화가 성숙된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 박정희 모델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선택적 친화론의 근거는 산업화 초기에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자택일의 문제이지 병행추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산업화 초기 단계에는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경제도약을 이뤄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김일영은 무어의 “No Bourgeoisie, No Democracy”테제를 부정하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김일영, 2005: 23) 무어 역시 “No Bourgeoisie, No Democracy"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방식의 산업화는 3가지의 '근대화의 길' 중의 한 유형일 뿐이며, 영국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 외에도 프러시아, 메이지 일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권위주의적 (파시즘적) 산업화의 길, 러시아와 중국의 농민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적 산업화가 있다는 비교 근대화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김일영은 영국도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서 민주주의가 아니었으며 영국의 민주화는 1928년에 완성되었고, 따라서 영국에서도 산업화와 민주주의가 병행발전하지 않았다는 주장 (김일영, 2005: 24)을 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적어도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는, 프러시아와 메이지 일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한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길'이 일반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김일영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발전"이라는 무어의 테제가 고전적인 산업화의 사례인 영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영국의 사례로도 일반화할 수 없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발전론'을 가지고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산업화론을 비판하지 말아야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면서도 김일영은 조심스럽게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양립시킨 사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김일영은 제3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권위주의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발전간의 관계는 ‘선택적’으로 친화적이라고 함으로써 “권위주의가 항상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는 급진적인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함정에 빠지는 위험을 피하려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고 모든 권위주의가 경제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므로 경제발전을 권위주의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일영은 권위주의와 경제발전이 친화력을 가지려면 권위주의 국가가 국내 계급으로부터 자율적이면서도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정책적, 제도적 능력을 갖추어야하고, “독재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약탈자가 아니라 경제발전이라는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계몽적 철인 왕”(이 부분은 필자 첨가)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한다. 그래서 김일영은 산업화 초기에 경제발전과 권위주의는 “선택적”인 친화력을 갖고 있고 그 선택은 “발전지향적인” 국가와 지도자이고 그렇게 선택된 권위주의 체제는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developmental authoritarian regime)라고 지칭함으로써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와 구별한다. (김일영, 1994: 11) 박정희 체제는 바로 이러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3) 내생적인 ‘전략적 선택’과 외생적인 ‘구조적 축복’
이러한 박정희의 권위주의 발전론의 역사적 필연성과 선택적 친화성을 부정하고 박정희의 전략적 선택과 박정희의 선택과 독립적인 외부적 요인 (계급구조, 지정학적 축복, 역사적 유산 등)이 가져다 준 축복과 같은 행운을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기적과 같은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설명하는 이론이 있다. (임혁백, 1994, 2006, 2009, 2010, Im, 2009, Im and Choi, 2010)
임혁백에 의하면(임혁백, 1994, 2006, 2009),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기 보다는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친화적인 계급구조의 형성, 국제분업구조의 변화와 같은 외생적, 구조적 조건의 성숙과 같은 구조적 조건, 국가와 시장 간의 적절한 분업구조의 형성, 적절한 발전전략의 선택 등과 같은 내생적 조건, 그리고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와 같은 외생적 조건의 다양한 결합으로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임혁백은 60년대 한국의 산업화의 성공을 설명하는 이론들에는 권위주의적 발전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조주의적 설명, 전략적 선택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임혁백, 1994: 314-319)
첫째, 내생적(endogenous) 요인을 강조하는 전략적 선택이론이 있다. 전략적 선택이론은 세계체제론이라는 구조주의적 틀내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의 성공을 지적한다. 세계체제론적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은 월러스타인이 이야기하는 ‘초청에 의한 상승전략’(promotion by invitation)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에서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의 상승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초청에 의한 상승전략”은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팽창기에 중심부의 자본가들과의 긴밀한 협조아래 즉 중심부의 초청에 의해서 주변부의 지위상승을 꾀하는 전략이다 (Wallerstein, 1979; 김성국, 1984; 김성진 1994) 그러면 1960년대에 왜 한국이 초청을 받게 되었는가?
초청을 받게 된 주요 배경에는 1960년대에 이르러 신국제분업질서(New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가 나타났다는 데 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에서의 노동비용의 증가로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게 됨에 따라 국제 자본은 노동비용이 싼 주변부로의 생산기지의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주변부는 중심부에 원료를 공급하고 주변부에 제품을 파는 고전적인 국제 분업질서가 중심부에서 원료와 중간재를 주변부에 공급, 조립하여 다시 중심부로 수입하는 신국제분업질서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신국제분업질서의 출현은 중심부와 주변부간의 임금격차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임금격차는 고전적 국제분업질서에서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국제분업질서하에서 생산기지의 재배치는 생산기술의 혁신으로 인한 생산공정의 분절화(fragmented operation)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주변부 생산시설의 원격관리가 가능해짐으로서 완결될 수 있었다(Frobel, Heinrichs, Kreye, 1980).
이러한 신국제분업질서의 출현으로 국제자본과 주변부와의 긴밀한 협력에 의해서 세계시장을 위한 상품의 제조가 주변부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잘 교육받고 생산성이 높으면서도 값싼 노동력이 무한정으로 존재하는 한국이 후보지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신국제분업질서의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나오는 바와 같이 후발산업화에 “초청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선택된 자는 드물었다.” ("many called, few chosen": 마태복음) 전략적 선택이론은 한국의 군부지도자 박정희의 적절한 산업화 전략의 선택을 강조한다.
박정희와 군부엘리트들은 처음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군부엘리트들은 쿠데타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해 민중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하였다. 쿠데타 이후 처음 나온 경제조치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와 부정축재 처리였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는 농촌소득의 향상을 통한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민중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수출은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아니라 국제수지의 개선이라는 2차적 역할로 한정되었으며, 투자재원의 대부분은 국내저축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기까지 했다(정윤형, 1984; Yong Jo Lee, 1990). 이러한 민중주의적이고 수입대체 산업화적인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일련의 정책적 실패로 인해 투자재원을 마련하는데 실패하고 심한 인플레를 초래함으로써의 계획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1963년 8월에 수정된 경제개발계획은 수정이 아니라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전환이라는 산업화전략 자체의 변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른 모든 부문에서의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훨씬 넘어서는 수출부문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4년에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략변경을 통해 신국제분업질서의 초청에 응답하였고 산업화의 성공의 기틀을 잡았다.
둘째,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된 계급구조로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의 성공을 설명하는 시각이 있다. 계급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략변경에 따르는 계급적 저항이 없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신국제분업질서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반해 한국(그리고 대만)은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먼저 1950년대에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인한 지주계급의 해체는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저항할 조직적인 정치 또는 경제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박종철, 1989) 또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소규모의 자영농은 ‘자루 속에 든 감자’와 같이 계급적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 주는 존재로 전략했을 뿐 이다.
그러나 지주계급의 부재만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환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1950년대에 추진되었다면 자유당정권과 지대추구 자본가들 간에 형성된 수입대체 산업화 연합의 저항에 직면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엘리트들은 수입대체 산업화의 정치적 연합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지배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다. 군부엘리트의 수입대체 산업화연합을 쉽게 파괴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지배연합이 민중주의 동맹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원조물자를 매개로한 자유당정권과 기업가들간의 정치적 연계망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박종철, 1989)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으로 부터의 원조가 계속 감소되어 가는 상황에서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던 경제세력들이 군부에 대해 기득이익의 분배를 강요할 만한 힘이 없었다. (장달중, 1992)
셋째, 계획합리성을 추구하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한국의 산업화를 설명하는 국가중심적 이론이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국가가 주도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화 국가는 시장을 대체하여 국가가 직접 생산활동을 담당하는 기업가적 국가도 아니고, 국가가 가격의 왜곡을 시정하고 공공재를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시장의 실패를 방지하고 공공재를 공급함으로써 경제가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게 함으로써 비교우위에 따라 성장하도록 유인하는 시장순응적인 신고전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국가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의도적으로 가격을 왜곡하여 지원의 배분을 거시경제정책에 맞게 유도하는 시장형성적 또는 시장지배적인 개발국가였다(Amsden, 1989; Wade, 1990). 자신의 의도에 따라 시장을 형성하려는 한국의 개발국가의 기본적인 무기는 금융의 통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 금융자본을 직접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차관의 배분을 통제하였다. 한국의 개발국가가 해외자본의 유입에서 직접투자보다는 차관을 선호했던 것은 국내자본가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Evans, 1985:205~6). 한국은 성공적인 발전국가였다.
넷째, 외생적 촉진요인 (exogenous facilitating factor)로서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 (benevolent hegemony)를 강조하는 이론이 있다. 냉전구조 하에서 국제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는 전초 국가로서의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해 미국은 한국의 후견국가로서 안보를 보장해 주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지원함으로써 60년대 이후의 한국의 도시중심적 산업화를 위한 계급적 기초를 쌓아주었다.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는 직접적으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는 한국 수출상품의 미국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어주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차관대여에 있어서 특혜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시혜”는 경제원조와 소비시장의 제공에 그치지 않고 한국이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과 다른 한국적인 또는 동아시아적인 ‘발전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는데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네가지 설명 즉, 전략적 선택론, 계급구조론, 발전국가론, 지정학적 (‘자비로운 헤게모니’) 설명 어디에도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의 성공에 반드시 권위주의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구조주의적 설명에서 박정희는 '구조의 배달부' (carrier of structure)일 뿐이다. 물론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의 선택, 계획합리적 발전국가의 선택은 박정희의 공이고 박정희의 개발주의적 리더십에 기인하는바가 크다. 그러나 반드시 그 선택을 권위주의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아시아에서 대만의 산업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장개석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이야기하고, 싱가포르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적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같은 동아시아 지역 내에 위치한 일본에서 전후 부흥과 기적을 가져온 정치지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 틀 내에서 활동하였다. 새로운 국제분업구조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적절한 발전전략을 선택하고, 주어진 계급구조를 도시중심적 산업화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약탈국가가 아니라 발전국가를 육성하는데에는 뛰어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리더십이 반드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되어야한다는 역사적 필연성은 없다. 박정희의 전략적 선택의 적절성, 리더십의 탁월성,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약탈적 (predatory) 독재자가 아닌 경제발전이라는 공익을 추구하는 개발독재자라는 점을 폄하해서도 안되지만, 1960년대, 1970년대의 초기 경제발전을 위해서 독재자 박정희와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주장은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는 박정희가 민주주의 틀내에서 초기 산업화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의 한국 또는 제3공화국은 권위주의 국가로 분류하기 보다는 준경쟁적 권위주의 (semi-competitive authoritarianism), 제한적 다원주의 (limited pluralism),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illiberal democracy), 선거 민주주의 (electoral democracy), 경성 민주주의 (democradura) 등과 같이 “결함은 있으나, 주기적 선거 실시, 반대당의 허용, 상당한 언론의 자유, 노조의 허용 등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가 제한적으로 유지되었던” ‘결손 민주주의’ (defective democracy)였다.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 과정에서 박정희는 미국, 국내의 정치적 반대세력의 압력에 직면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의 외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임혁백, 2004 상: 236-237) 이러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외피는 적어도 1971년까지 유지되었고 박정희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도 단군 이래 최초의 조국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바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다는 것을 적어도 1960년대에 보여주었다.
5. 박정희의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비판적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1960년대, 1970년대의 산업화가 권위주의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1960년대의 산업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외피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산업화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불가능하다는 테제는 증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의 한국에서 초기 산업화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의 리더십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산업화에 유리한 구조적 조건이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박정희 모델 자체에 대한 평가이다. 박정희 모델에 대해 평가를 하는데 있어 기존의 많은 논의는 ‘민주주의’를 절대가치로 놓고 그에 근거해서 박정희 모델을 윤리적으로 평가하는데, 이 경우 박정희 모델은 자체적, 자동적으로 부정된다. ‘억압국가’ 논의 역시 윤리적 정당성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시대 착오적이고 소박한 낭만주의자”) 이에 반해 김일영(1994)은 박정희 모델을 효율성의 측면에서 평가한데에 의의가 있다. 효율성이 윤리성의 결함을 메꾸고도 충분히 남는 경제성이 있는 모델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효율성 즉, ‘목적합리성’의 측면에서도 박정희가 부정될 수 있어야 박정희 모델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박정희 모델이 과연 전형적인 발전지향적인가이다. 몇몇 학자는 박정희 체제를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developmentalist authoritarian regime)’가 아니라 ‘국가엘리트의 배를 불리는 권위주의체제’(authoritarian state elite enrichment: ASEE)’로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의 국가를 반드시 발전지향적 성격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박정희의 국가에는 ‘약탈국가적’(predatory state) 성격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 엘리트의 치부(state elite enrichment)를 위한 국가 (ASEE)로도 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칭코 사건), 차관도입 문제, 은행대부, 정치자금과 관련한 정경유착 등의 사례가 바로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다.
둘째, “과연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1960년대, 1970년대에 필요했는가이다.”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론은 산업화 초기에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필요한 이유로, 첫째, 경제적 발전과정에서 근대화에 반대하는 반동적 계급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강압력(coercion), 자율성 (autonomy)이 요구되기 때문이며, 둘째, 초기의 강제적 축적을 위해 소비를 억제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를 억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셋째, 세계체제의 압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발전국가가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가 박정희 체제의 등장 이전에 이미 해소되었다. 첫째, 도시중심 산업화에 저항할 수 있는 지주계급은 이미 50년대의 토지개혁으로 계급이 해체되었다. 둘째, 노동계급(민중)의 저항은 1960년대의 노동 시장적 상황(농촌의 무제한적 유휴노동력 공급)으로 정치력이 아닌 시장에 의해 해결되었다.(Im, 1987) 셋째, 남미와는 달리 세계체제의 압력은 부드러웠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경우 미국의 헤게모니는 ‘자비로웠다 (benevolent)' (자비로운 헤게모니) 미국은 이승만 정권 이래로 한국을 냉전의 전초국가로 이용하는 대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시혜를 베풀고 발전전략 선택에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가 영미의 자유시장모델 (liberal market model)과 대조적인 국가주도의 발전국가 모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특수성에 기인한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경험적으로 확인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60년대 또는 제3공화국 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는 유지되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산업화를 추진하고 경제발전을 이뤄낼 수 있는 국가강도, 국가자율성, 국가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한국에서 본격적인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언제 시작되었으며 과연 성공적이었는가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한국에서 본격적인 권위주의적인 산업화는 1970년대에 추진되었다. 따라서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모델은 유신체제 하에서 국가, 재벌, 관료의 3자동맹이 민중과 노동자를 성장의 과실의 분배로부터 배제한 채 중화학공업화를 밀어붙이는 발전국가모델이다. 따라서 권위주의 발전국가 모델은 민주화를 지연시키고, 관료적 권위주의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실패하였다.
1960년대 제한적 민주주의가 유지되었지만, 박정희가 지향한 것은 강력한 권위주의적 질서를 토대로 근대화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산업화의 정치가 전개되면서 성장제일주의와 기술적 관료주의가 정치의 자율성을 억눌렀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정당, 이익집단, 결사체가 이끌어가는 정치의 영역이 줄어든 반면 행정의 영역은 늘어갔다. ‘선성장, 후분배’에 저항하는 집단을 억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와 같은 국가통제기구가 수립되고 강화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외피 하에서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수립하여 행정, 입법, 사법 3부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국가주도 산업화를 위해 권위주의가 반드시 필요했는가이다. 모든 ‘국가주도 경제’는 권위주의적이 아니다. 핀란드, 오스트리아, 일본의 발전국가도 국가주의적인 경제발전을 민주주의 하에서 훌륭하게 이룩하였다. 박정희는 '산업화의 심화' (deepening)를 위해 권위주의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기위해 (유신) 산업화의 심화 (중화학공업화 HCI)를 명분으로 내걸었고,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산업화가 민주화의 선행조건은 아니다. 산업화를 위해서 개발독재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역사적 필연론은 경험적으로도, 당위론적으로 지지되지 않는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자유주의적 산업화는 선택의 문제이지 역사적 필연은 아니다.
넷째,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산업화는 ‘지속가능한 모델’인가에 대한 평가이다. 박정희의 산업화 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은 성장과 분배가 동반성장하기 어려운 불균형 발전모델이었다.
박정희의 산업화 프로젝트를 시행한 주체는 정부도 아닌 다국적 기업도 아닌 가족중심의 기업집단인 ‘재벌’로 불리는 국내대자본가였다. 이것이 한국적 발전국가 모델의 특징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재벌을 육성하고 (inventing bourgeoisie) 이들 재벌로 하여금 중화학공업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하였다. 재벌을 산업화 프로젝트에 유인하기 위해 독점이윤을 보장해 주고 기업의 손실과 위험을 사회화(socialization of risks)하였다. 재벌에 대해서는 금융, 재정적 특혜, 외자배분, 진입제한, 국내시장의 보호와 독과점이 주어진 반면, 노동자와 소비자 대중은 재벌의 손실과 위험의 사회화 부담을 지면서 성장의 과실과 이익의 배분에서는 배제되고 억압당하였다.(이병천, 2005)
박정희의 불균형 발전모델은 공간적으로 지역간의 격차를 확대 심화시켜 지역분열, 지역갈등을 조장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성장제일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착취하였다. 한국 근대화의 반생태주의는 부동산 투기, 토건국가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박정희의 발전국가 모델은 자율적 감시와 책임규율이 취약한 모델이었다. 국가는 금융통제권을 활용하여 재벌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하면서 재벌을 육성하였으나, 궁극적으로 국가는 재벌에 포획될 수밖에 없었다. 관치금융이야말로 재벌의 부실이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을 때 국가가 발권, 국채, 조세를 통해 부실의 부담을 사회화하는 연결고리의 출발점이다. 재벌의 경영실패에 대해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치가 결여되어 있을 때 재벌의 실패의 비용은 채권자, 예금자, 주주, 노동자, 그리고 국민일반이 짊어지게 되고 성장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
6. 결론을 대신하여: 민주적 발전론과 권위주의적 발전론의 비교
1987년 민주화 이래 민주정부의 초라한 경제적 실적에 실망하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 많은 권위주의적 발전론자들은 고도성장의 재현을 위해 박정희를 무덤에서라도 불러와야한다고 선동하였다.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권위주의체제의 부활까지 주장하였다.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고삐풀린 방종은 규율되어야하고 한국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북한은 제거되어야하며, 경제성장을 위해서 자유는 유보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에 대한 강한 향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박정희 향수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역대 민주정부의 실적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권위주의 정부에 비해서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성장율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에서 민주정부가 권위주의정부보다 우월하다는 개관적인 통계학적 증거를 제시해야한다.
(1)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의 경제발전실적
여러 가지 부문에서 민주정부의 경제실적은 과소평가되어 왔다. 결국 민주정부 ‘무능론’과 민주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은 (disenchantment)는 신화임이 드러났다. 1987년 이후 민주정부의 경제실적은 강건하고, 튼튼하고, 지속성이 있었다. 권위주의 발전론이 예견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더 높은 임금과 많은 분배, 소비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있었고 실제로 ‘1997년 노동자대투쟁’의 결과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했으나 높은 임금 상승이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지 않았다. 1987년의 투자율은 30.8%로 남미의 신생민주주의는 물론 선진국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었다. (Table 10; Figure 6) 1987년 GDP 대비 총고정자본형성율도 선진국의 20%, 남미의 22%보다 매우 높은 29%를 유지하였다.(Table4; Figure 7) 1987년의 GDP성장율도 11%라는 고성장율로서 박정희시대의 평균 성장율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Table 6) 민주정부 시기를 통털어서 외환금융위기 하에 있었던 1999년의 -7%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1998년의 5%) 평균 GDP 성장률은 6.28%로 권위주의 시기 (1961-1986) 평균 성장률보다 낮지 않았다.
둘째, 민주정부 시기의 총고정자본형성 (GFCF: as % of GDP)의 경우 경제기적을 이룬 권위주의 시기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61에서 1986사이의 평균 총고정자본형성율은 24.5%인데 반해 민주정부 시기에서는 약 두배 정도로 높게 나왔다.
셋째, 민주정부의 경제성장은 질적으로 권위주의 시대의 경제성장 보다 나았다. 민주정부 는 고인플레, 무역적자, 고실업, 저임금, 열악한 사회복지제공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야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고성장은 만성적인 고인플레, 무역적자를 동반하였는데 반해 민주정부는 고성장, 고인플레, 무역적자간의 트릴레마 (3중고 trilemma)를 해결하였다. 민주정부는 1998년부터 만성적 무역적자를 무역흑자로 전환시켰고 (글로벌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 제외) 물가를 안정시킴으로써 “저인플레, 무역흑자, 고임금, 저실업하의 고도성장” 패턴을 정착시켰다. 한국기업의 높은 경쟁력은 한국 기업들로 하여금 높은 임금, 세금을 지불하고도 고용을 줄이지 않으면서 투자를 계속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같은 실증적 자료는 “경제성장과 권위주의의 선택적 친화론”이나 “민주정부 무능론“ 그리고 ”권위주의적 발전 필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경제성장율, 고용, 무역수지, 투자, 총고정자본형성율에서 모두 민주정부가 권위주의정부보다 나은 성적을 내었다. 한국의 민주정부 사례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민주정부는 경제발전 뿐 아니라 높은 임금, 더 나은 사회복지제공, 그리고 무엇보다도 낮은 실업율 유지를 통해 선진국이 추구하는 형평성과 성장의 조화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권위주의 정부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도 민주적 발전론이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왜 권위주의보다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에서도 우월한가?: "민주적 발전론"을 위한 변론
왜 한국에서 민주적 발전론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우월성이 경제발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가?. 첫째, 민주화로 인해 법치주의 (rule of law)가 강화되었고 강한 법치주의는 경제발전에서 요구되는 재산권의 보호에 있어서 권위주의 독재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하에서는 재산권은 인치주의 (rule of man)에 의해 자의적으로 보호된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투자의 미래 할인율(discount rate)이 높아질 수 밖에 없고 자본가들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강한 법치주의는 자본가들의 투자에 대한 미래 할인율을 획기적으로 낮추어 줌으로써 자본가의 투자증대를 유인한다.
둘째, 민주화로 인해 민주적 책임성 (수직적 책임성과 수평적 또는 대의기구간의 책임성)이 높아짐으로써 정치인, 대표, 관료들의 지대추구행위(rent-seeking)나 부패행위를 억제하여 경제적 효율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권위주의 하에서는 독재자의 약탈행위를 통제, 감시할 수 있는 책임성확보 장치가 없기 때문에 부패, 지대추구, 약탈 (predation) 행위가 만연하고 경제의 전반적 효율성이 떨어진다.
셋째, 민주주의 하에서는 정치가들은 국민들의 표로 계산되는 지지를 극대화해야 계속 권력의 자리에 머물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하여 이를 반영해 주어야한다. 응답성 (responsiveness)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가지고 있는 분야이다. 반면에 권위주의 독재자들은 권력의 장악과 유지에 있어서 국민의 표 (지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집행하고 (policy implementation),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건전한 경제와 사회적 규제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에 비해 확고한 비교우위가 있다.
Table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의 지배, 책임성, 부패에 있어서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동아시아의 권위주의 국가들보다는 우위에 있고 대만, 일본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정부와 대표의 응답성 (responsiveness), 정치적 안정, 테러와 폭력의 부재, 효과적인 정부, 정부 규제의 질의 측면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고 이는 경제성장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된다. 특히 “효과적인 정부” 지수에서 1996년 0.90에서 2008년의 1.26으로 상승하여 거의 선진국 수준이 되었고, 정부 규제의 질 측면에서 1996년의 0.46에서 2007년의 0.88로 거의 두 배 이상 신장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민주정부로 하여금 높은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데 내생적으로(endogenously) 기여하였다. 만약 민주화가 없었다면 권위주의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탈냉전 시대의 세계화와 IT 혁명이라는 변화된 국제경제환경에 대응하고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박정희가 구축한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끈 견인차였지만 그 발전국가는 세계화, IT혁명, 탈냉전과 미국일극체제의 등장으로 시대착오적인 무용지물 (obsolescent)로 추락하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이 상대적으로 형평성있는 분배를 동반한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10년이라는 빠른 시간 내에 민주주의로의 전환(transition)과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를 성공리에 완료하였고, 그 후 지속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높여가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정부는 1997년 말 동아시아 경제위기로 발전국가모델이 무용지물화 되었을 때, IT에서 21세기 한국을 먹여살려줄 “먹거리”를 발견하였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IT강국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한 결과 현재 IT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는 국가가 되었다. (Table 1 참조) 따라서 5.16군사쿠데타 50주년에 나는 “민주적 발전론”이 여전히 한국에 유효하고 한국이 나아가야할 발전론이라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경제발전은 “좋은 민주주의” (good democracy)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좋은 거버넌스" (good governance)에 뒤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 민주주의, 후 경제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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