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어렸다. 세상에는 아직까지 보지못한 것들이 많았고 그 미지의 여백에 자신의 상상을 채워나갔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친구와 하루종일 뛰어놀면 그만이었고 땅거미가 질 무렵 나를 찾으러 나온 엄마와 함께 집에 들어가면 따뜻한 밥상과 정겨운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이는 어렸다. 적어도 과거에 어린이는 어렸다.
어렸던 어린이는 현실과 만나면서 시련을 겪는다. 갑자기 밀려든 가난에 밥을 굶기도 하고 취업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히기도 한다. 아무 걱정없이 풍족하게 살아가는 주위 사람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어릴적 자신이 그려놓았던 파스텔톤 채색은 아직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우정, 그윽하게 지켜보는 부모의 시선, 책에서 읽은 유토피아의 세계가 아직 그를 지탱하고 있다. 그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식량삼아 그는 이상이라는 곳을 향해 오늘도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느날 문득 그는 자신의 아들을 발견한다. 아들에게 과거 자신이 느꼈던 여백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와 학원이라는 꽉 짜여진 틀 속에서 대화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TV와 인터넷은 거침없이 아들의 뇌리에 박혀갔다. 아들의 친구는 본적이 없다. 어쩌면 친구라는 존재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어린이가 아니었다. 언젠가 "인생이 다 그런거 아닌가"라는 말을 하는 아들을 보고 무서워졌다. 거기에 특별히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이 오히려 어리게 느껴졌다. 아들은 이미 인생의 쓴맛을 맛본지 오래인듯 하다.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좋은 성적이 곧 돈이라는 사실을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들은 인생을 달관하고 있었다. 희망이란,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은 본래 그러한 것임을 그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것이다.
그가 발견한 아들은, 오늘날 어린이는 어린이가 아니었다.